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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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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홍은 당 고종과 측천무후의 장남으로, 이복 형 이충을 제치고 656년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는 문무에 능하고 인망이 두터웠으나, 어머니 측천무후에게 미움을 받아 675년 급사했다. 사후 효경황제로 추존되었으며, 동생 당 중종이 복위한 후 의종으로 추존되었다. 자식이 없어 동생 예종의 아들인 이융기를 양자로 삼았으며, 이융기는 훗날 당 현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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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 (당)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홍 (李弘)
칭호황태자 (추증: 의종 효경황제)
신분왕 → 황태자
경칭전하
출생일영휘 3년 (652년) 추정
사망일상원 2년 4월 26일 (675년 5월 25일)
사망지허비궁, 낙양, 당나라
매장지공릉
배우자배씨 (裴氏, 배거도의 딸)
자녀양자: 현종
아버지고종
어머니측천무후
당나라 황태자
재위 기간656년 - 675년
이전이충
이후이현
대왕
재위 기간655년 - 656년
사후 정보
묘호의종 (義宗)
시호효경황제 (孝敬皇帝)
묘호 (영어)Yizong
시호 (영어)Emperor Xiaojing

2. 생애

고종측천무후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으로, 이복 형 이충이 폐위되자 656년 네 살의 나이로 황태자가 되었다. 이홍은 학문과 자애로운 성품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효성이 지극하고 인덕이 있었다고 한다.[7]

661년, 허경종, 허유사, 상관의, 양사검(楊思儉)은 아름다운 문장들을 모아 500권으로 묶은 ''요산옥채''(瑤山玉彩)를 고종에게 바쳤고, 이홍과 그 관료들은 비단을 하사받았다.

669년 설 무렵, 이세적이 지휘하는 당나라 군대가 668년고구려를 정복한 후, 이홍은 고종의 가혹한 칙령에 대해 청원을 제출했다. 그는 소위 탈영병 가족에 대한 처벌을 철회해 줄 것을 요청했고, 고종은 이에 동의했다.

671년, 고종과 무후는 장안을 떠나 낙양에 거주하게 되었고, 이홍은 장안을 책임지게 되었다. 그는 종종 병을 앓았지만, 여러 자비로운 행동을 했다. 관중 지역에 대기근이 발생했을 때, 황실 창고에서 쌀을 분배하고, 동주(오늘날의 위남시)의 공공 토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했다.

하지만 이홍은 어머니 측천무후가 죽인 아버지의 후궁 숙비 소씨 소생의 두 딸 의양공주와 선성공주가 유폐되어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고종에게 혼인을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7] 이 일로 측천무후는 아들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무후는 이홍에게 불만을 품고 그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암살하거나 처형했다. 이홍은 무후에게 국정에 너무 간섭하지 말고 통치권을 넘겨달라고 제안하면서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 이후 이홍은 장안에서 낙양으로 가서 부모님과 합류했고, 장군 배거도의 딸 배씨와 결혼했다.

675년, 이홍은 합벽궁(合壁宮) 기운전(綺雲殿)에서 부모와 식사를 하던 도중 경련을 일으키며 죽었다.[8][9] 고종은 아들의 죽음에 비통해하며 효경황제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이는 중국 역사상 황태자에게 황제의 시호를 내린 첫 사례였다.[7] 이홍은 동생인 이현이 복위한 후 '''의종'''(義宗)으로 추존되었다.

이홍은 아들이 없었기에, 동생 예종의 아들 이융기가 그의 가문에 추존되었다.

2. 1. 출생과 황태자 책봉

고종측천무후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다. 이홍의 생년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동복 동생인 이현이 영휘 5년 12월(655년)에 이미 태어났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종이 즉위한 직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7]

이복 형 이충이 황태자였으나, 어머니 측천무후가 왕황후와 소숙비를 모함하여 폐위시키면서 656년 봄에 이홍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李弘|이홍중국어현경 원년(656년) 1월에 4살의 나이로 황태자가 되었다.[7] 고종은 자식들 중 이홍을 가장 눈여겨 보았으며, 문무에 뛰어나고 온화한 성격으로 인망도 두터워 기대를 받았다.

감국을 맡아 실적을 쌓아 어진 군주의 풍모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측천무후가 감금하여 살해한 소숙비의 소생인 이복 여동생 의양공주와 선양공주의 석방을 고종에게 주청했기 때문에 어머니인 측천무후로부터 미움을 받았다.[7] 상원 2년(675년) 측천무후와 회동한 직후 급사하였다. 일설에는 측천무후가 동생인 이현을 황태자로 세우기 위해 이홍을 독살했다고도 한다.(『신당서』, 『당회요』, 『자치통감』, 앞의 두 책에서는 짐독이 사용되었다고 한다).[8][9] 그러나 이홍이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고 그의 사후 고종과 측천무후가 매우 슬퍼했다는 기록을 보면 과로사했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고종은 이홍의 죽음을 애도하여 의종의 묘호와 효경황제의 시호를 내렸다. 이홍은 자식이 없어, 동생인 예종의 셋째 아들 이융기(후의 현종)를 양자로 삼았다.

2. 2. 황태자 시절

이복 형 이충이 폐위되자 영휘 7년(656년) 1월에 네 살의 나이로 태자가 되었고, 연호도 현경으로 바뀌었다. 이홍은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잦았다는 설이 있으나 실제로는 측천무후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인덕이 있었다.[7] 그는 어머니가 죽인 아버지의 후궁 숙비 소씨 소생의 두 딸 의양공주와 선성공주가 서른이 넘도록 시집을 가지 못한 채 유폐되어 있는 것을 알고 이를 안타깝게 여겨 고종에게 누이들을 시집보내 달라고 청하였다.[7]

이홍이 성장하면서 그는 학문과 자애로운 성품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한때 관료 곽유(郭瑜) 밑에서 ''좌전''을 공부했는데, 초나라 목왕이 그의 아버지 초나라 성왕을 살해한 기록에 이르자[4], 그 사건에 대해 읽는 것만으로도 괴로워했고, 곽유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괴로워하여, 곽유는 그에게 대신 ''예기''를 공부하라고 권했다.

661년, 허경종, 허유사, 상관의, 양사검(楊思儉)은 아름다운 문장들을 모아 500권으로 묶어 ''요산옥채''(瑤山玉彩, 문자 그대로 "요산의 옥색")라는 제목으로 고종 황제에게 바쳤고, 이홍과 그 관료들은 비단을 하사받았다.

669년 설 무렵, 이세적이 지휘하는 당나라 군대가 668년고구려를 정복한 후, 이홍은 고종 황제가 도망간 군인을 참수하고 그의 아내와 자녀를 강제 노역에 투입하라는 이전의 가혹한 칙령에 주목하여 청원을 제출했다. 청원에서 그는 때때로 소위 탈영병들이 실제로는 무죄였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그들은 아팠거나, 아무도 모르게 고구려 군에게 붙잡혔거나, 고구려 전선으로 가는 길에 익사했거나, 고구려 전선에 갇혔을 수도 있었다. 그는 소위 탈영병 가족에 대한 처벌을 철회해 줄 것을 요청했고, 고종 황제는 이에 동의했다.

671년, 무후가 수도 장안을 싫어했기 때문일 것이다(무후가 왕 황후와 소 소의가 자신에게 복수하는 꿈을 반복해서 꿨기 때문). 고종 황제와 무후는 장안을 떠나 동쪽 수도 낙양에 거주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장안으로 거의 돌아가지 않았다. 이홍은 장안을 책임지게 되었지만, 그는 종종 병을 앓았고, 결정은 주로 그의 참모인 대지덕, 장문관, 소덕소(蕭德昭)에 의해 내려졌다고 한다. 그러나 여러 자비로운 행동들이 이홍에게 기인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관중(수도 지역)에서 대기근이 발생했을 때, 이홍은 자신의 경비병들조차 도토리와 나무 껍질을 먹는 것을 알고 황실 창고에서 쌀을 분배하고, 동주(同州, 대략 오늘날의 위남시, 산시성)의 공공 토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한 것이다.

이복 형이자 유 부인이 낳은 황태자 이충이 있었지만, 황후가 된 어머니 무후가 폐위시키고 이홍이 태자가 되었다. 고종도 자식들 중 가장 눈여겨 보았으며, 문무에 뛰어나고 온화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지며, 인망도 두터워 기대를 받았다.

감국을 맡아 실적을 쌓아 어진 군주의 풍모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무후가 감금하여 살해한 소숙비의 소생인 이복 여동생 의양공주와 선양공주의 석방을 고종에게 주청했기 때문에 어머니인 무후로부터 미움을 받아 불필요하게 여겨졌다.

2. 3. 측천무후와의 갈등과 죽음

측천무후가 낳은 아들들 중 장남으로, 이복 형 이충이 폐위되자 656년 1월에 네 살의 나이로 태자가 되었다. 이홍은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잦았다는 설이 있으나 실제로는 측천무후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인덕이 있었다고 한다.[7]

이홍은 어머니가 죽인 아버지의 후궁 숙비 소씨 소생의 두 딸 의양공주와 선성공주가 서른이 넘도록 시집을 가지 못한 채 유폐되어 있는 것을 알고 이를 안타깝게 여겨 고종에게 누이들을 시집보내 달라고 청하였다.[7] 이 일로 측천무후는 아들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고, 병이 위독해진 고종이 황위를 이홍에게 물려주려고 하자 권력의 주축에서 밀려날 것을 우려하였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홍이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고 그의 사후 고종과 측천무후가 매우 슬퍼했다는 기록을 보면 이홍은 과로사한 것이라는 반론도 제기된다.

이홍의 이러한 자비로운 행동은 그의 어머니 무후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소숙비의 딸인 의양공주와 고안공주는 어머니 때문에 궁궐 내에 가택 연금되었고, 39세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결혼하지 못했다.[5] 어느 날 이홍이 우연히 그들을 만나 불쌍하게 여겨 고종에게 그들의 혼인을 허락해 달라고 청했고, 고종은 이에 동의했다. 무후는 분노하여 즉시 그들을 전의(Quan Yi)와 왕욱(Wang Xu)이라는 두 궁궐 호위병에게 시집보냈고, 이홍에게 불만을 품게 되었다. 무후는 남편의 치세 동안 무자비한 통치자처럼 행동하며 그녀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마음대로 암살하거나 처형했다. 무후가 너무 강력해지자 이홍과 다음 황태자인 동생 이현은 걱정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관계는 이홍이 무후에게 국정에 너무 간섭하지 말고 그에게 통치권을 넘겨달라고 반복적으로 제안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이후 무후의 명령에 따라 이홍은 장안에서 더 이상 지휘를 맡지 않고 낙양으로 가서 부모님과 합류했다. 그곳에서 그는 장군 배거도의 딸인 그의 아내 태자비 배씨와 결혼했다.

675년, 이홍은 부모와 함께 낙양 근처의 합벽궁을 방문하던 중 갑자기 사망했다. 이홍은 합벽궁(合壁宮) 기운전(綺雲殿)에서 부모인 고종, 측천무후와 함께 식사를 했고 도중에 경련을 일으키며 죽고 말았다.[8][9] 대부분의 전통적인 역사가들은 무후가 그를 독살했다고 믿고 있다. 고종은 아들의 죽음에 매우 슬퍼했고, 전례 없는 조치로 이홍에게 효경황제의 시호를 추존하고 황제에 걸맞은 예우로 장례를 치르도록 명령했다.[7] 중국 역사상 황태자에게 황제의 시호를 내린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홍은 후에 동생인 이현이 복위한 후 '''의종'''(義宗)으로 추존되었다.

이홍은 아들이 없었다. 잠시 동안 그의 조카인 이융기는 그의 동생 이단의 아들로 그의 가문에 추존되었다. 그의 동생 중종의 치세 동안, 그는 황실 사당에서 숭배를 받았고 (묘호는 의종), 그의 아내 태자비 배씨도 애황후로 추존되어 그곳에서 숭배받았다. 그러나 중종이 죽고 예종이 즉위한 후, 재상 요원지과 송경은 실제로 황위에 오르지 않은 이홍이 황제들과 함께 숭배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했고, 이에 따라 그는 낙양에 별도의 사당을 받게 되었고 더 이상 묘호 의종으로 불리지 않았다.

2. 4. 사후

측천무후가 낳은 아들들 중 장남으로, 이복 형 이충이 폐위되자 656년 네 살의 나이로 태자가 되었다. 이홍은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잦았다는 설이 있으나, 실제로는 측천무후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인덕이 있었다고 한다.[7] 그는 어머니가 죽인 아버지의 후궁 숙비 소씨 소생의 두 딸 의양공주와 선성공주가 서른이 넘도록 시집을 가지 못한 채 유폐되어 있는 것을 알고 고종에게 누이들을 시집보내 달라고 청하였다.[7] 이 일로 측천무후는 아들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고, 병이 위독해진 고종이 황위를 이홍에게 물려주려고 하자 권력에서 밀려날 것을 우려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홍이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고, 그의 사후 고종과 측천무후가 매우 슬퍼했다는 기록을 보면 과로사한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이홍은 합벽궁(合壁宮) 기운전(綺雲殿)에서 부모와 함께 식사를 하던 도중 경련을 일으키며 죽었다.[8][9]

고종은 아들의 죽음에 몹시 비통해하며 시호를 내려 효경황제라고 칭했는데, 이는 중국 역사상 황태자에게 황제의 시호를 내린 첫 사례였다.[7] 이홍은 후에 동생인 이현이 복위한 후 '''의종'''(義宗)으로 추존되었다. 동생인 당 예종의 셋째 아들 이융기를 그의 사후 양자로 들였다.

대부분의 전통적인 역사가들은 675년 이홍이 부모와 함께 낙양 근처의 합벽궁을 방문하던 중 갑자기 사망했으며, 측천무후가 그를 독살했다고 믿고 있다. 고종은 아들의 죽음에 매우 슬퍼했고, 전례 없는 조치로 이홍에게 효경황제의 시호를 추존하고 황제에 걸맞은 예우로 장례를 치르도록 명령했다.

3. 평가

이홍은 고종과 무측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복 형인 황태자 이충이 있었지만, 어머니 무측천이 이충을 폐위시키고 이홍을 태자로 삼았다. 고종은 이홍을 총애했으며, 이홍은 문무에 뛰어나고 온화한 성격으로 인망이 두터웠다고 전해진다.

감국을 맡아 실적을 쌓아 어진 군주의 풍모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무측천이 감금하여 살해한 소숙비의 소생인 이복 여동생 의양공주와 선양공주의 석방을 고종에게 요청했기 때문에 어머니인 무측천에게 미움을 받았다. 상원 2년(675년) 무측천과 만난 직후 급사했는데, 『신당서』, 『당회요』, 『자치통감』은 무측천이 동생인 이현을 황태자로 세우기 위해 이홍을 독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1]

고종은 이홍의 죽음을 애도하여 의종의 묘호와 효경황제의 시호를 내렸다. 이홍은 자식이 없어, 동생인 예종의 셋째 아들인 이융기(후의 현종)을 양자로 삼았다.

4. 가계

고종무측천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홍의 생년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친동생인 이현이 영휘 5년 12월(655년)에 이미 태어났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종이 즉위한 직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사후 동생인 당 예종의 셋째 아들 이융기를 양자로 들였다.[1] 이융기는 훗날 당 현종으로 즉위하였다.[1]

관계이름
아버지고종
어머니무측천
양자현종 (예종의 셋째 아들)


참조

[1] 문서 Crown Princess Consort (太子妃) and the daughter of Pei Judao (裴居道). However, they were childless. Following her husband who was posthumously honoured as an Emperor, she then become Empress Ai (哀皇后).
[2] 문서 Initially was the 3rd son of [[Emperor Ruizong of Tang]], but by Empress [[Wu Zetian]]'s order, Li then became the adoptive son of the posthumous emperor, who was childless.
[3] 간행물 Volume 202 of Zizhi Tongjian recorded that Li died on the jihai day of the 4th month of the 2nd year of the Shangyuan era of Tang Gaozong's reign. This corresponds to 25 May 675 in the Gregorian calendar. 0675-05-25
[4] 문서 See Zuo Zhuan, Rule of Duke Wen. (The Spring and Autumn Annals, of which the Zuo Zhuan was an edited version of, was a history of the State of Lu during the Spring and Autumn period, and King Mu's killing of King Cheng happened at the same time as the rule of Duke Wen of Lu.)
[5] 웹사이트 "舊唐書 列傳 卷三一至四十" http://ef.cdpa.nsysu[...] 2007-09-20
[6] 문서 『[[旧唐書]]』巻第5 高宗 下
[7] 서적 중국을 뒤흔든 불멸의 여인들 2 글누림
[8] 서적 서태후의 인간 경영학 지식여행
[9] 서적 무측천 평전 책과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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